생각하는 시간

나라를 지키는 도리란 국민의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롸맨 2007. 12. 20. 13:08
나라를 지키는 도리란 국민의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2007/12/19 오 전 3:05 | 역사와 철학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께서 대답하기를 족식(足食), 족병(足兵), 그리고 백성의 신뢰(民信之)이다. 자공이 묻기를 이 셋 중에 하나를 버린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병을 버려라(去兵). 나머지 둘 중에서 하나를 버린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식을 버려라(去食). 예부터 사람이란 죽지 않을 수 없지만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서지 못한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나라를 경영하는 도리로 먼저 족식足食 - 경제와 족병足兵 - 군사력과 민신지民信之 - 국민의 믿음을 꼽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당장 먹지 않고 사람이 살아갈 수 없고, 군사력이 없으면 스스로 지킬 수 없으며, 국민의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스스로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뜻밖에도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닌 백성의 믿음을 꼽았다. 가장 먼저 버릴 것은 군사력이요, 그 다음 버릴 것은 경제력이되,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안 될 것이 백성의 믿음이라 한 것이다. 한 번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또 역사를 살펴보면 그 말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더없이 깊이 이해하게 된다. 당장 베트남 전쟁이다.

1950년대부터 프랑스와 그리고 프랑스와 바통터치한 미국과 1970년대까지 계속 이어진 전쟁에서 베트남은 결코 미국이나 심지어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했던 프랑스에게조차 그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북베트남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그리고 세계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영웅 - 국부라고까지 불리웠던 호치민을 중심으로 북베트남은 물론 남베트남의 민중까지 똘똘 뭉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전투기록들을 살펴보면 피해는 북베트남군이 항상 더 컸다. 막강한 공군에, 포병의 화력지원에, 풍족한 군수물자에, 어느것 하나 미군에 비해 나을 것이 없었던 북베트남군이고 보니 승리하더라도 더 큰 피해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은, 아니 베트남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미국과의 전쟁에 기꺼이 한 목숨 바치며 나섰고, 그 결과 세계최강대국 미국으로부터 남배트남을 해방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도, 미국에 견줄 수 있는 무수한 전차와 장갑차와 전투기와 폭격기와 전투헬기를 가지고서도 기껏 개인화기만으로 무장한 탈레반을 비롯한 저항군에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소련군이 아무리 강하면 무엇하는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그들을 반기지 않는 것을. 아프간의 남자라면 누구나 총을 들고 소련군에 저항했고, 첨단병기를 가지고도 어디서든 나타나 공격해 오는 아프가니스탄인들에는 소련군조차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사실상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은 각종 장비들로 군사력에서 한참 우위에 있었음에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은 누가 중국 인민의 마음을 잡았느냐에 의해 갈린 것이었다. 실제 싸우기야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더 열심히 싸웠다. 비록 일본군에 쫓겨 중경까지 밀리기는 했지만 상하이를 비롯 여러 전선에서 그럭저럭 선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 내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중국 인민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마오쩌둥의 성공적인 선전선동전술은 중국공산당군의 엄정한 군기와 함께 중국 인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마침내 국민당으로 하여금 남쪽의 작은 섬 대만으로 쫓겨가도록 만들었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부정부패한 인사들을 숙청하는 일이었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뼈아팠는가를 알 수 있다.

국공내전 뿐일까? 그 전 청이 붕괴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늙어 기력이 빠진 사자라고는 하지만 당시 청의 인구는 2억 이상, 여전히 전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산업혁명으로 더 이상 그 비중이 예전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강남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2억의 인구를 부양하고도 남을 정도였으며, 도자기와 차 등으로 벌어들이는 은 역시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주족에 의한 청의 조정은 한족인 백성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한족인 백성들 역시 청의 조정을 완전히 따르지 않았다. 인구가 많아도 그 인구를 모두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미약한 지배체제는 나라의 경제력마저 온전히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 청 조정에 대한 귀속의식이 약했다. 

아편전쟁에서 불과 몇 개 대대에 불과한 영국군에 형편없이 깨진 것이나, 의화단의 난에서 북경까지 함락당한 것, 그나마 양무개혁으로 어느 정도 근대화를 이루고도 우세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일방적이라 할 정도로 처참히 패한 것도 결국 청의 병사들의 전투에 대한 의지가 그만큼 약했기 때문이었다. 리훙장의 회군의 예에서 보듯 지방 토호의 사병집단의 토호에 대한 충성심은 매우 강한 편이었지만, 정적 청이라고 하는 나라에 소속되어 싸울 때에는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었다. 여기에 청 지배층의 부정부패까지 더해졌으니 이겼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지리멸렬한 모습에 대한 실망이 더해지면서, 청의 지배력은 갈수록 약화될수밖에 없었고, 삼민주의를 내세운 쑨원과 야심이 컸던 군벌 위안스카이에 의해 청의 왕조는 그 종막을 고하게 된다. 외세의 침략도 한 몫 하기는 했지만, 한때 세계최강대국으로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청을 멸망시킨 것은 그 내부의 민심이반과 그것을 불러온 부정과 부패와 무능 때문이었던 것이다.

청이 멸망시킨 명도 사실 청에 의해 멸망했다기보다는 가정연간 이래 계속되어 온 관리들의 탐학과 국정의 난맥상으로 인해 민심이 이반되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사실 후금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산해관은 천혜의 요새였다. 제아무리 건국초기의 활력이 넘치던 후금의 팔기군조차 그 성벽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마저 산해관을 공격하다 명군이 쏜 대포에 맞아 전사했을 정도로 그 방비는 굳고 단단했다. 그러나 무능과 무기력을 더해가던 명의 조정은 아직 미약하던 이자성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키워주는 결과를 낳았고, 이자성은 불만이 팽배해 있던 백성들의 지지를 몰아 수십 만의 병력으로 명의 황제가 있던 북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자성에 의해 북경이 함락당하고 자신의 애첩이 이자성에 의해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오삼계가 산해관의 문을 열고 청군을 끌어들이니, 이로써 청이 다시금 중국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온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몽골의 원을 몰아낸 것도 몽골의 잔인한 지배에 반발한 백련교를 위시한 농민반란군에 의해서였다. 당을 결정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한 것도 황소가 일으킨 농민반란이었고, 그 전 수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것도 수양제의 폭정에 반발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아는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의 몰락도 태평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반란인 황건의 난이었다.

그런가 하면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정규군군이 아닌 스페인 민병대가 쫓아내는 일도 있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의 강대국을 연파한 프랑스군도 프랑스가 임명한 왕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스페인 민중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이 끝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 민족의식으로 인해 각지에서 저항이 완강해지는 반면, 프랑스 스스로 전쟁에 지쳐가면서 프랑스인의 마음이 나폴레옹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타난 것도 결국 이러한 교훈에서였다.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다잡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마음이 떠나가면 어떻게 하든 나라가 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국민의 마음을 나라에 묶어 놓으면 된다. 그래서 그때까지 단순한 피지배자일 뿐이던 것이 동등한 - 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족주의다. 국민으로 하여금 스스로 나라의 구성원임을 일깨워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해 움직이도록 하기 위한 것.

사실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피지배계급은 한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지배계급과 동일시되는 존재가 아니라, 지배계급이 그 나라를 지배함에 있어 항상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도전자이며 경쟁자였다. 역사가 가르쳐주듯 그 힘이 커지면 언제든 일어나 지배계급을 위혐해 올 수 있고, 방심하거나 힘이 약해지면 도리어 그들에게 먹혀 모든 것을 빼앗길 수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항상 지배계급은 그들을 감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들로 하여금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빼앗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종교의 힘을 빌리든, 선심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든, 아니면 무력으로 억누르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기득권을 도전받지 않기 위해서, 정치의 역사라 하는 것은 곧 그러한 과정의 역사였다. 민족주의란 바로 그러한 끝에 나온 크리티컬이었던 것이다.

당장 2차세계대전만 하더라도 독일이 기습공격을 하면서 초기 소련은 매우 불리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그때 스탈린이 앞에 내세운 것이 "어머니 러시아"였고, 러시아라는 이름만 나오면 불타오르는 러시아의 인민들은 소비에트가 아닌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선으로 나가고, 또한 후방의 공장에서 전장에서 쓰일 물자들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 그토록 가혹하던 스탈린의 철권통치나 러시아의 인민들을 감시하던 정치위원보다 "어머니 러시아"라고 하는 구호가 나치 독일이라고 하는 강대한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고 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갖는 힘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춘추시대 초나라 왕이 어느날 이웃 정나라에 사신을 보내 내정을 정탐해 오도록 시켰다. 사신이 돌아오더니 말하기를

"성은 높고 해자는 깊으며 병사는 많고 군량미는 산과 같으니 가히 치기 어렵겠스니다."

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초나라왕은 오히려 기뻐하며 정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하고는 이같이 말했다.

"정나라는 본디 작은 나라다. 그런데 성이 높고 해자가 깊다는 건 백성들을 그만큼 부역에 동원했다는 것이니 그 원망하는 마음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병력이 많다고 하면 장정들을 함부로 끌어갔다는 것이고, 군량미가 많다는 건 백성들로 하여금 가진 것을 적게 만드는 것이니 우리가 공격하기만 하면 오히려 백성들이 호응하여 쉽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나라는 그토록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와 많은 군대와 풍부한 군량에도 불구하고 변변히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군사력도 경제력도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제아무리 군사력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도 정작 국민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스스로 멸망을 필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국민의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군사력과 경제력에만 힘을 기울이다 보면 도리어 등을 돌리고 떠나버린 국민들로 인해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근대적인 국가일수록 더욱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는 것이다.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자신을 위해서.

그래서 조상들은 눈에 보이는 신외지물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민심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강한 군대를 바라는 것이야 말로 왕이 바라는 것일 터인데도 생업을 돌보라며 군포로 병역을 대신하도록 했고, 세금 역시 더해봐야 고작 3할에 불과했으니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몇 차례 큰 위기에도 불구하고 6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끝내 그 기본을 잊고는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해버렸을 때조차 백성들이 그 망한 나라를 위해 스스로 나서 심지어 목숨까지 내걸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외적으로 군사적인 힘을 갖추어 과시하거나, 안으로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갖추는 것만이 아닌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국민으로 하여금 신뢰할 수 있도록,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를 지키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 여길 수 있도록, 교육과 홍보를 통해서만이 아닌 실천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만이 국민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 발벗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 말로 나라를 지키는 최선의 유일한 방책인 셈이다.